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수군은 鹿島萬戶 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5) 명량해전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물러난 뒤 원균은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
2. 조선수군의 고금도 이진 (무술년(1598년) 2월 17일)
->출처 『이충무공 전서』 권9, 부록1 이분 찬 「행록」ꡒ무술년 2월17일 이진고금도.ꡓ
1) 고금도 이진의 배경
-이 때는 고하도에서의 충분한 기반을 가지고 위세도 장하게 행군함
-일본 수군 주둔 상황 - 가토 기요마사 (가등 청정) : 울산,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 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조선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3대 대첩이란?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 대첩
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한산도대첩 :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크게 무
조선수군의 존재이유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해상을 방위하려는 데에 있었고 또한 그들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임란 이전에 있었던 왜변이 모두 영호남의 연해지역에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모두 그 지역에서 해결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고 양남지방 수군의 역할과 해방의 중
조선의 대일관계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은 사대와 교린이다. 명나라에게는 사대정책을 편 대신 왜(倭)·여진 등에게는 교린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교린 정책을 펼쳤다. 일본이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지 않는 한, 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은 결국 왜군의 침입을 받는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이순신을 비롯한 영웅들의 활약상이 차례대로 전개되며, 그 결과 왜군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로 쳐들어가 마침내 왜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허구적인 인물들이 허구적으로 풀어 가는 《임진록》은 문학적
조선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의 명성에 가려져 있는 판옥선을 재조명 하고 과연 어떤 배였기에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에 비해 우세한 전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알아보겠다.
● 판옥선 이전 시기의 군선
1. 고려말기의 군선
고려말기의 군선은 그 구조와 선형이 특별한 것이 아
I. 연구동향
1. 일제강점기 일본측의 연구성향
일제강점기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임진왜란사의 연구는 대부분 대체로 정치사와 관련된 것이거나 전투사에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연구분야와 주제도 크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일본인의 우월성을 과장 선전하고 조선인의
조선의 함선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않았다. 이순신의 함선이 차례로 일본수군을 격파하고 적장의 목을 돛대에 꽃아 일본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라고 했으며,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로 결사항쟁의
뜻을 모았던 것이다. 뿐만 아